오랜만에 돌아온 왕궁은 참으로 처참한 상태였다.

    전투가 일어난 듯 이곳저곳 깨져 있는 건 물론이요, 약탈도 서슴지 않았는지 금붙이나 값비싼 보석들은 모두 사라졌다.

    분명 반 년밖에 시간이 지나지 않았음에도, 왕궁은 예전의 모습을 잃은 채 쓸쓸하게 남겨져 있었다.

    물론 미하일은 왕으로 즉위한 이후 대대적인 왕궁 보수에 들어갔지만, 하루 이틀 만에 전쟁의 상처를 지울 수 없는 법.

    사람들이 자주 드나드는 공간은 대부분 수리를 마쳐 예전의 위용을 되찾았다.

    그리고 그 흔적은 문득 옛날의 향수를 불러오곤 했다.

    대대적인 수리 덕분에 예전의 그 위용을 되찾았기 때문에-

    지금 이 환상이 보이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겠지.

    그래 아직 아버지와 함께 후원을 뛰노는 저 환상 말이야.

    “꺄아-!”

    천진난만하게 뛰노는 어린 나의 웃음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그 자리를 벗어나도 사람이 많은 곳으로 도망쳐도

    내 귀에는 여전히 웃음소리가 맴돌았다.

    그리고 그 웃음소리는 점차 느려지고 낮아지며 수많은 목소리로 바뀌어가며 나를 잡아끌었다.

    “다 너 때문이야.”

    “아니야.”

    “너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죽진 않았을 텐데.”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윽…..”

    물에 빠진 듯 주변의 소리가 점점 흐려진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나를 질타하는 소리는 점차 커져갔다.

    나는 구석에 가 쪼그려 앉아 귀를 막았다.

    하지만 여전히 환청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으…. 아윽…… 으윽…..”

    괴로워. 너무 괴로워. 누구라도 도와줘. 제발 내 귀에서 이 환청을 끄집어내줘.

    제발….. 제발….. 누구라도 구해 줘….. 제발……

    “아샤?”

    그리고 그런 내게 구원이 왔다.

    그가 가까워지자 환청은 조금씩 사그라졌다.

    내가 그의 품에 안기자 환청은 언제 그랬다는 듯 사라져 나를 더 이상 괴롭히지 않았다.

    “아흐…. 흐으….. 흑…..”

    나는 그의 품 안에 안겨 계속 눈물을 흘렸다. 마치 악몽을 꾼 아이가 엄마의 품 안에 안긴 것처럼, 나는 아기처럼 그의 품 안에 안겨 엉엉 울었다.

    그가 내게 품고 있는 감정을 안다면 분명 밀어내야만 했다. 여지를 주면 안 되니까, 그가 가진 감정을 심화시켜선 안 되니까.

    하지만 그를 밀어내기에는 내 정신을 천천히 갉아먹는 그 환청이 너무 무서워서

    그를 떠나면 그것들이 다시 들려와 나를 절망으로 빠뜨릴 것 같아서

    미하일을 밀어낼 수 없었다. 그가 주는 안온한 온기와 나를 진정시키는 이 냄새를 놓지 못했다.

    나는 마치 어미의 품을 갈구하는 새끼처럼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흐윽….. 아으으으…… 읏…..”

    미하일은 이런 나를 꼭 안아주고 토닥여주었다. 언제라도 괜찮다는 듯 그는 묵묵히 내 등을 두드려줄 뿐이었다.

    토닥 토닥

    나는 품에 안겨 끊임없이 눈물을 흘렸다. 한 방울에 내 공포와 두려움을 담아 떨어트리며, 악몽으로부터 비롯된 어두운 감정을 희석시켰다.

    그렇게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을까.

    길을 잘못 든 몇몇 사람이 화들짝 놀라서 되돌아가고 환하게 떠 있는 해가 조금씩 서쪽으로 향한 뒤에야 나는 그의 품을 벗어났다.

    여전히 감정은 완전히 갈무리 되지 않고 귀에서 그들의 속삭임이 들려오는 듯 했지만, 이 이상 매달리면 민폐니 어쩔 수 없었다.

    안 그래도 바쁜 애 붙잡고 뭐 하는 짓인가 싶기도하고.

    “좀 괜찮아?”

    “…. 크흥….. 으응…..”

    콧물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하일은 소매로 엉망이 된 내 얼굴을 닦아주며 다시 되물었다.

    “진짜로 이대로 가도 괜찮겠어? 너무 힘들면 오늘 하루 정도는 같이 있어도 괜찮아.”

    “괘…. 괜찮다니까안…. 흡! 어…. 어서 가아…..”

    나는 미안함에 괜히 그를 밀어냈다. 어서 가. 왕궁 보수 작업이나 토지 분배 때문에 안 그래도 바쁠 텐데 어서 가서 업무 봐.

    하지만 미하일은 물러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고 나를 바라보았다.

    곤란? 뭐가 곤란한 거지? 아….

    나 걔 옷을 잡고 있었구나. 그것도 아주 세게.

    마치 가지 말라는 것처럼. 입으로는 가라고 떠밀면서 손으로는 미하일을 붙잡고 있었구나.

    “아……. 아으으….”

    얼굴이 절로 빨개졌다. 이…. 이게 뭐야….. 대체 왜 이런 짓을 한 거야.

    “같이 갈까?”

    나는 부끄러워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하일은 이해한다는 듯 내 손을 잡아주었다.

    그날 하루 종일 나는 잘 때를 제외하곤 미하일의 옆에 붙어 있었다. 업무를 보든 밥을 먹든 그의 곁에 앉아 같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나를 괴롭힌 환청은 들려오지 않았다. 아주 신기하게도 말이다.

    그 후 나와 미하일은 그동안 거리를 뒀던 것이 무색하게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미하일의 곁이 아니면 그 끔찍한 환청이 계속 들려왔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나마 잘 때는 덜한 편이었지만, 깊은 잠에 빠지기 전까지 끔찍한 악몽이 나를 덮치는 건 여전해 내 도피처가 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미하일 옆에 꼭 붙어 시간을 보낼 수밖에.

    짝사랑을 이용해 먹는 느낌이 강하게 들긴 하지만…..

    밥을 먹든 업무를 보든 하다못해 잠을 잘 때도 나를 저주하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리고

    나를 원망하며 내 죽음을 바라고 내 파멸을 원하는 망자들의울음소리가계속내귓가를맴돌며내정신을갉아먹어서나를하나씩죽여나가는게

    무섭고도 두려웠다.

    “아샤.”

    “아.”

    “계속해야지”

    “미…. 미안… 헤헤…. 잠깐 딴 눈을 팔았네…. 자, 입 벌려”

    미하일이 입을 벌렸다. 나는 그 구멍 사이로 사과 한 조각을 집어넣었다.

    곧 으적 소리와 함께 사과는 목구멍 너머로 사라졌다.

    “맛있네.”

    미하일은 담담한 어조로 평가를 내렸다. 그러곤 다시 입을 열었다.

    다시 달라는 신호였다. 나는 바로 신호를 캐치하고 사과를 배달했다.

    누군가에게는 기이하게 보일 수도 있는 광경. 연인들끼리나 할 짓을 왜 친구가 하냐고 물을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그건 모두 착각이다.

    하루 종일 붙어 다니는 주제에 서류도 못 보고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음식 시중이라도 들어 주는 거다.

    식당에 갈 시간도 없어서 집무실에서 간단한 샌드위치로 떼우는 건 너무 불쌍하니까.

    대신 밥을 먹여주는 거다. 밥 먹을 시간이라도 아끼라고 친구로서 도와주는 거다.

    아무튼 그런 거다.

    갑자기 미하일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 바꾸라는 신호였다. 나는 사과를 내려놓고 먹일 만한 과일이 있는지 물색했다.

    사과는 패스하고, 딸기도 먹였으니 패스, 배는 싫어하니까…….

    ‘포도.’

    통통하게 알이 오른 포도를 하나 집어 그의 입에 넣었다.

    달고 좋은 걸 넣었는지, 미하일의 표정이 편해졌다.

    그의 표정이 편해지니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작게 콧노래를 부르며 계속 포도를 배달했다.

    그렇게 손을 몇 번 왕복하니 포도는 곧 바닥이 났다.

    그러면 이번에는 오렌지.

    큼지막한 오렌지 한 조각을 들자, 미하일이 내 손목을 턱 잡았다.

    “한 번 맛 봐줘. 오렌지가 함정이 많아서.”

    수긍하고 오렌지를 한 입 작게 깨물었다.

    작은 과육 모음들이 톡톡 터지며 입안을 물들었다. 달디 단맛이었다.

    “먹어도 괜찮아.”

    그러자 미하일은 내 손의 오렌지 조각을 물었다. 그의 숨결과 혀가 내 손가락을 깜짝 놀래키곤 그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예고 없는 스킨십. 깜짝 놀라며 손을 떼지만 이미 내 손가락은 그의 침으로 더럽혀져 있었다.

    “야! 너…. 너!”

    “아샤 말대로 다네.”

    “너 방금 뭐 한 거야?!”

    “이 정도면 충분하네. 그만 먹을래.”

    “말 돌리지 마!”

    미하일은 내 말을 무시하고는 종을 울리곤 제 입가를 톡톡 두드린다. 키스 신호였다.

    “하녀를 불렀잖아, 아샤. 그럼 키스해야지.”

    “말 돌리지 말라고 했잖아. 아까 그건 뭐냐고?”

    “하아…. 아샤. 두 번 얘기해야 하는 거니? 어서 이리로 와. 키스해야지.”

    “너…. 정말….!”

    약속은 약속이니깐. 허락되지 않은 스킨십을 멋대로 한 그에게 화가 났지만, 나는 그의 다리 위에 앉았다.

    내가 앉기가 무섭게 내 몸을 감싸는 그의 팔.

    곧 내 입안에 그의 혀가 들어왔다.

    키스는 오렌지 맛이었다.

    잠들기 직전의 짧은 시간. 그 15분 남짓한 시간이 주어진 유일한 개인 시간이었다.

    끔찍한 환청이 덮치지 않는 오로지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그런 개인 시간.

    보통이라면 책을 읽거나 잠시 휴식을 취하는 거에 썼겠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책상 깊숙한 곳. 보통의 사람이라면 쓰지도 않을 공간.

    그 은밀한 공간에는 편지가 하나 있었다.

    발신자는 나, 수신자는 사촌 지그문트. 폴스키로의 망명을 희망한다는 내용.

    몇 달 동안은 꺼낼 일이 없을 리라 생각했던 편지였다.

    그 끔찍한 환청과 왕궁 밖으로 한 발자국도 밖에 나가지 못하는 내 신세로선 망명은 꿈도 못 꾸었으니깐.

    지금도 상황은 여전했지만, 나는 이 편지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미하일의 스킨십이 진해졌기에, 그가 내게 마음을 부딪혀 오는 것을 더 이상 거리끼지 않았기에.

    이대로 있다간 그에게 정조를 잃을 것만 같아서.

    무리한 결정이지만 나는 망명을 결심했다.

    비록 시작부터 그 끝까지 모두 기적을 염두해 둔 불안하기 짝이 없는 계획이었지만.

    나는 억지로 이 일을 밀어붙였다.

    아무것도 못 하다, 어영부영 그에게 몸을 빼앗기는 것보단 나으니깐.

    작은 소망을 쥐고 그 편지에 불어넣는다.

    제발 이 편지가 내 사촌에게 닿기를. 그리고 이 편지를 읽은 사촌이 망명을 받아주기를.

    간절하게 소망하며.

    그 다음날 아침 편지는 은밀한 루트로 폴스키를 향해 떠났다.

    그리고 정확히 일주일 후

    미하일은 내게 청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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