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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etter of Recommendation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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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etter of Recommendation (14)

    * * *

    페카폴리스의 추천장을 따내고 사 일이 지났다.

    “자, 떨지 말고, 표정 관리 잘하고, 돌발 상황 일어나면 무표정으로 능청 떨기. 알겠지?”

    “아, 알겠다…!”

    내게 지속적인 지도를 받은 소피아는 나름 훌륭한 연기를 펼칠 수 있게 되었다. 시험 삼아 페카폴리스와 만나게도 해보았는데, 다행히 별 의심 없이 지나갈 수 있었다. 그녀가 냉소적인 미소를 지을 때면, 일순 카피 에고를 만든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이에 관련해서 내가 간과하고 있었던 점이 있었다. 몸을 완전히 교체하는 마법은 ‘대외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일시적 변신인 폴리모프는 비교적 흔했지만, 교체는 아니었다. 의식 쪽으로 들어가게 되면 성황청에서 금기시하는 사술로 취급되기 때문이었다. 고작 하룻밤 만에 사용할 수 있는 기술도 아니었고.

    고로. 의심이 있을지언정 눈치채기는 힘들다. 몸에 별다른 마법적 처리를 가한 게 아니니까. 말 그대로 의식만 이동했을 뿐이다.

    “그래도, 백작은 감이 좋으니까 조심해. 이상한 걸 요구하면 ‘해드릴까요?’ 하면서 재수 없게 웃는 것도 잊지 말고.”

    “마, 마법을 요구하면…?”

    “내가 눈치채지 못하게 몰래 써줄게. 넌 그럴싸한 몸짓만 취하면 돼.”

    옷을 모두 갈아입고 거울을 본다.

    “도와줘서 고마워 클락. 지금이라도 아스트라에 가고 싶으면 말해. 손이 닿는 데까지 도와줄 테니까.”

    “괜찮아요. 마탑에 박혀서 연구하는 게 훨 재밌으니까요. 그리고, 아스트라는 실습이 무섭기도 하고요…”

    클락의 도움으로 구한 ‘진짜’ 생도복.

    서부에 아스트라 생도복을 취급하는 곳이 없어 그냥 갈까 고민했지만, 클락이 아는 지인이 있다면서 한 마법사를 소개해주었다. 아스트라의 중퇴생이었다. 성적이 안 돼서 나갔다나 뭐라나. 덕분에 그때 입은 옷을 받을 수 있었다.

    조금 사이즈가 크지만… 여성용으로 받을 수 있는 게 어딜까. 나는 거울 앞에서 헤실헤실 웃으며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우와… 진짜 어색하네요.”

    겉모습은 소피아지만, 속에 붉은 마녀가 있다는 사실을 유이唯二하게 아는 클락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이미지 매치가 안 되는 탓이었다. 나는 끼 부리기를 멈추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눈앞의 소녀는 잠깐의 정적 동안 금세 원래의 표정을 되찾았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무감정한 얼굴, 축 늘어진 입꼬리. 소피아의 몸을 만들면서 올라가게 했는데 금세 내려갔다.

    언뜻 차갑게 느껴질 수 있는 어조로 말한다.

    “나도 좋아서 하는 거 아니야.”

    “이제야 마녀님답네요.”

    클락이 건넨 물을 들이켜고 짐 정리를 한다. 추천장, 돈주머니, 여분의 옷가지 등등. 곧 떠날 사람의 모습. 나는 짐보따리를 꽉 싸매며 소피아를 불렀다.

    “소피아, 아니. 유진 언니?”

    “으, 응?”

    “이제부터 모두를 속일 거야. 페카폴리스는 한번 만나봤으니 평소대로만 하면 돼. 알겠어?”

    “…알겠어, 소피아.”

    “완벽해.”

    평소대로만. 소피아가 뺨을 두드린다.

    나는 목소리 톤을 조절한 후 소피아를 시켜 포탈을 열었다. 약간 가라앉은 미적지근한 공기가 포탈 너머로 들어온다. 텁텁한 공기의 발자욱을 쫓아 도달한 곳엔, 분홍머리의 아가씨가 단아한 자세로 책을 읽고 있었다.

    소피아의 손을 잡고 포탈을 폴짝 넘는다. ‘유진 언니’는 약간 귀찮은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내 손에 이끌려 따라왔다.

    “페카폴리스 언니―!!”

    “응?”

    홀을 가득 채우는 명랑한 목소리.

    페카폴리스는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들었다.

    “오랜만에 둘이 왔네. 무슨 일이야?”

    나와 페카폴리스는 농담이나 사적 얘기를 스스럼없이 주고받을 정도로 관계가 발전했다. 이렇게 가까워질 수 있는 이유는 역시, 내 재능이 그녀가 보기에 몹시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시시때때로 제자가 될 수 없냐는 질문을 하면서 말문을 트는데 안 친해질 수가 없었다.

    나는 ‘유진 언니’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이제 수도로 올라가려구요. 그동안 신세져서 고마웠어요. 유진 언니도, 페카폴리스 언니도요.”

    추천장을 따냈으니 입학 준비만 하면 된다. 페카폴리스는 내가 입은 생도복과 짐을 보더니 아쉬운 얼굴로 입을 다셨다.

    “결국 가는구나. 수도에 머물 곳은 있고?”

    “그것도 유진 언니가 도와준다고 했어요.”

    “유진이면… 믿을 만하겠지. 가는 길 신의 축복을 빌어줄 수는 없지만, 평탄하길 바라.”

    “빛 아래 평안하기를! 고마워요!”

    고개를 들어 ‘유진 언니’를 바라본다. 그녀는 한숨을 푹 쉬며 손을 잡았다. 나는 고개를 숙여 아쉬움을 표한 뒤 같이 등을 돌렸다.

    “잠깐, 유진.”

    그때, 페카폴리스가 말을 걸어왔다. 반사적으로 대답할 뻔했으나 다행히 고개만 돌리는 선에 그쳤다. 그녀는 유진을 향해 말했다.

    “너도 같이 가는 거야?”

    소피아는 자신이 ‘유진’이라는 것도 잊고 벙찐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금세 차가운 표정을 되찾고 입을 열었다.

    “저는 데려다주기먄―, 흠, 큼… 데려다주기먄 하고 돌아올 생각이에요.”

    “그래? 알겠어.”

    네가 혀를 다 씹네. 신기해하는 페카폴리스를 뒤로 하고 바삐 발을 놀린다.

    * * *

    마탑에서 나온 우리는 준비해둔 로브를 걸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가는 길 최대한 노출을 줄일 생각이다. 여기에 인식 저해 마법까지 걸어 존재감을 지우면 완벽했다.

    “죽을 맛이다 언니야…”

    소피아는 인간들이 북적이는 거리에 두려움을 표하면서 발발 떨어댔다. 하지만, 그녀가 죽어가는 얼굴로 푹푹 한숨을 내쉬는 건 비단 인간들뿐만이 아닐 테다.

    “한 번만 더 하면 돼. 고생했어.”

    길이 점점 험해진다. 소피아는 ‘귀족’이라는 작자가 왜 이런 산골짜기에 사는지 의문을 품었지만, 자세한 내막을 설명하기엔 입만 아플 뿐이었다.

    “잠시 떨어져 있어.”

    우리를 알아차리지 못한 병사들을 지나쳐 저택 정문에 도달한다. 나는 인식 저해 마법을 풀고 로브를 벗었다. 그러곤 대문 옆에 달린 황금 종을 가볍게 쳐 청아한 종소리를 울렸다.

    “에르제가 말을 걸면, 몸이 안 좋아서 얘기할 기분이 아니라고 해.”

    에르제 헤르도나. 브리도니아의 전속 시녀이자 이 저택의 시녀장. 나는 그녀가 오기를 기다리며 웃는 표정을 유지했다.

    ―휘이잉…

    부자연스러운 바람 소리가 나고, 불규칙한 마나의 흐름이 느껴진다. 하여간 뒤에서 나타나기 좋아하는 여자다. 나는 소피아에게 전음을 보내 말없이 뒤를 돌라 명령했다.

    소피아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일단 내 명령에 따라 뒤돌며 중얼거렸다.

    “…에르제?”

    그러자 사르륵, 하고 풀리는 투명화.

    “…여전히 감이 좋으시네요. 반가워요.”

    시녀장이 나타나 고개를 숙인다.

    “다시 오셨군요. 저기 계신 생도분은 일행이신가요?”

    에르제의 얼굴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밝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여기에 다시 찾아올 이유는 ‘그것’ 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희망을 품곤 다시 물어본다.

    ‘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일단은요. 그리고 오늘은 몸이 안 좋아서 대화하기가 벅차네요. 죄송해요.”

    “혹시 아프신―…”

    “….”

    “…알겠습니다.”

    더는 대답하지 않고 입을 다문다. 눈치 빠른 에르제는 그녀가 대화할 기분이 아님을 직감하곤 내게 고개를 돌렸다. 나는. 소피아 클레이드는. 고개를 푹 숙이며 활기차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소피아 클레이드에요.”

    “어머, 작고 귀여우신 분이네요. 귀족 자제이신가요?”

    에르제는 자신과 같은 머리카락 색에 첫 번째 호감을 표했고, 성이 있다는 사실에 두 번째 호감을 표했다. 귀족 자제라면 필히 다른 문제로 올 게 분명했으니까. 적어도, 그녀가 생각하기에는.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뺨을 긁적였다.

    “그게, 말하자면 복잡한데…. 문서상으로는 멸문한 곳이거든요. 남부의 클레이드 자작가라고, 들어보셨나요?”

    “…멸문?”

    “그리고 생도도 아니에요. 정확히는 입학 준비생이죠. 헤헤. 부끄럽네요.”

    에르제가 당황한다. 상대는 몰락 귀족에, 생도도 아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올 이유가 무엇이냐. 그녀는 떨리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불현듯 스친 불길한 가능성. 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백작님을 만나러 왔어요.”

    “…이유는?”

    “으음, 자세히는 말하기가 어렵고, 백작님에겐 ‘선물’이 도착했다고만 말해주실래요?”

    “….”

    입을 열었다 말기를 반복한다. 에르제는 말하기를 주저했다. 설명을 요구하려 고개를 돌려도, 몸이 아프단 핑계를 댄 유진은 요지부동이었다.

    “…오래 기다리게 했네요. 죄송해요. 이쪽으로 와주세요.”

    결국.

    그녀는 원하는 말을 하지 못했다.

    * * *

    3층, 귀빈실.

    “이쪽으로.”

    에르제는 사족없이 딱 필요한 말만 꺼내며 우리를 상대했다. 대답에 대한 기대가 없는 말은, 생각보다 더 무미건조하고 차가웠다. 기대 없는 말엔 감정도 무엇도 없었다. 그러나 딱 한 가지 느껴지는 게 있었다면, 잊기 위한 몸부림. 그녀는 ‘소피아 클레이드’란 인물을 잊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아무쪼록, 돌아올 때까지 편하게 쉬고 계세요.”

    끼이익, 쿵. 하고 닫히는 문.

    에르제가 사라지자 소피아는 축 늘어지며 앓는 소리를 냈다.

    “으어어… 이제 무리다아….”

    “마지막. 마지막이야. 이것만 잘 넘어가면 돼.”

    “우으…”

    나도 긴장되기는 매한가지였다.

    나는 본체와 연결한 체인 링크를 점검하며 차를 들이켰다. 의식이 옮겨지는 조건은 육체 기능의 완전한 정지. 그러니까, 한 번 뒈져야 한다는 뜻이었다. 뭐… 의식과 영혼의 보존이라는 안전장치가 있는 이걸 ‘진짜 죽음’이라 부르긴 뭣할지 몰라도―

    “하아….”

    이거나 그거나. 죽음은 내가 느낄 수 있는 자극의 한계치였다. 이걸 느껴버리면, 다른 걸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하는. 조금 변태스러운 걱정이 들었다.

    ―똑똑.

    그런데 5분도 지나지 않아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으헥.”

    “…표정 관리해.”

    화들짝 놀란 소피아는 내 말을 듣고 유진의 표정을 연기했다.

    “백작님이 바로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안내해드릴까요?”

    문 너머로 들리는 에르제의 목소리. 나는 에르제에게 들리지 않게 전음으로 몰래 속삭였다.

    ―2층 식사실이냐 물어.

    소피아는 긴장한 얼굴로 되물었다.

    “2층 식사실인가요?”

    “네. 전과 같은 식사실이에요. 안내해드릴까요?”

    고개를 젓는다. 길은 아니 따로 안내받을 필요는 없다.

    “…둘이서만 갈게요.”

    에르제는 몇 초의 침묵을 유지하곤 알겠다며 등을 돌렸다. 바닥을 울리는 구두 굽 소리. 나와 소피아는 그녀가 떠난 후 정확히 삼 분 후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또각, 또각.

    식사실까지 가는 길은 조용했다. 지나가는 인원은 많았으나 오가는 말은 없다. 나와 소피아, 우리를 지나가는 하녀와 사용인들까지 모두. 눈 한 번 마주치지 않고 지나치기 바빴다.

    그렇게 계단을 밟고, 조명을 지나 2층 식사실에 도착한다. 식사실. 아니, 도축장의 불은 켜져 있었다. 나는 테이블 옆으로 삐져나온 익숙한 인영人影에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올백머리의 중후한 외모의 미중년.

    “왔나?”

    파하르 슈발리에 폰 브리도니아. 그는 미리 도착해 자리를 잡았다. 에르제가 보고하고 우리가 귀빈실을 떠나기까지의 시간을 고려하면 7분 정도인데, 이 짧은 시간에 식사실에 올 정도면 상당히 급했나 보다.

    나와 소피아는 고개를 숙이고 앞으로 걸어갔다. 동시에, 소피아는 그간 연습해왔던 대사를 읊기 시작했다.

    “…백작님을 위해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어요. 부디 마음에 들어 하셨으면 좋겠네요.”

    “좋다. 내 기대해보지. 선물은 어딨지?”

    곧바로 본론. 소피아는 당황하지 않고 연기를 이어나갔다.

    “후후. 급하시네요. 제가 이걸 준비하려고 얼마나 큰 노력을 했는데요. 부디 백작님께서 제 노고를 알아주셨으면 좋겠네요. 소피아?”

    이제부터 내 차례다.

    “부디.”

    귀족이 보일 수 있는 극한의 예의를 보이며 고개를 숙인다. 책을 봐서는 결코 배울 수 없는 귀족만의 예법. 슈리엘과 함께 다니며 몸으로 터득한 배운 자의 몸짓. 나는 귀족 전용 언어라 불리는 북동부 가드리슈어를 구사하며 말했다.

    “개척과 도전의 상징, 모든 모험가의 아버지― 대부, 브리도니아의 주인을 만나게 되어 영광이에요.”

    “…상당히 어려 보이는구나. 나이가 몇이지?”

    “열다섯이에요.”

    “….”

    떨리는 눈. 추악한 탐욕으로 가득 찬 눈동자였다. 다시 말해, 그는 내게 흥분했다. 정말이지, 열다섯 살 소녀에게 흥분하다니 인간 말종이 따로 없었다. 물론, 성욕이 아니라 살해욕이라는 차이가 있겠지만, 그가 답도 없는 쓰레기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나 오늘 도축장의 소 되어 도살당하기로 마음먹었으니 응당 어울려줘야겠지.

    ―투둑.

    나는 생도복의 단추를 풀고 왼 어깨의 방패 모양 흉터를 보였다. 속옷 사이로 매끈한 겨드랑이와 은밀한 치부가 보인다. 허나 백작은 ‘그딴 것’ 따위에 집중하지 않았다. 오직 왼 어깨에 새겨진 방패 문양에 눈을 처박곤 뜨겁고 가는 숨을 내쉬었다.

    “제 이름은 소피아에요. 이제 내년이면 아스트라에 입학해, 클레이드의 핏줄이 돌아왔노라 선언할 예정이죠. 물론, 어제까지만 해도요. 무슨 말인진 알고 계실 거라 믿어요.”

    그는 클레이드 자작가를 알고 있었고, 이 문양이 가문을 부흥시킬 마지막 기회란 것도 알고 있었다. 백작은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진정시키고 무어라 말을 꺼내려고 했지만, 나는 그가 말을 내뱉기 전에 결정적인 화두를 꺼냈다.

    “저는 오늘, ‘사고사’로 죽을 거랍니다.”

    참을 수 없는.

    그리고 참지 않아도 되는.

    ―스르륵.

    그를 유혹하듯 포동포동한 살집을 강조하며 옷을 벗는다. 가슴, 팔, 허벅지, 다리. 옷가지가 줄어들수록 날것 그대로의 부끄러운 나신이 드러났다. 백작은 눈 한번 깜짝 안 하고 이 음란하고 배덕적인 모습을 똑똑히 눈에 담았다.

    나는 흥분과 부끄러움으로 상기된 얼굴을 수줍게 숙이며 말했다.

    “…그리고, 백작님에게 요리되어 식탁 위에 올려질 운명이죠. 부디 머리, 가슴, 팔, 다리. 어느 부위도 빼놓지 않고 모두 조리해주시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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